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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에 대해서
정리를 해드리려고 하는데요.
19세기 후반 왕을 대신한 섭정으로
정치를 주도한 인물로
많은 분들이 익히 들어보셨을 것 같아요.
그가 주도 했던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여러 변화를 겪지만 세계정세를
따라가지는 못 했다고 평가받고있죠.
그리고 오늘 소개해드릴 이 정책에
대한 의견 또한
찬.반의견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죠.
이 정책을 펼치기 전에 그가 눈여겨본 나라는
청나라였다고해요.
그 때의 청은 1860년 아편전쟁에 패배해
러시아,프랑스,영국등 서구에 많은 이익을
양도한 상태였는데요.
청나라와의 관계를 통해서 많은 이득을
얻게 된 서구는 서서히 그 시선을 조선으로 바꿔요.
이 때 앞장선 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이었고요.
이들은 한.불.영 3국의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할 수 있다고 의견을 내며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 하는데요.
하지만 러시아의 남하는 더디었고
이를 우려했던 프랑스 선교집단은 불신을 받아요.
그리고 조선의 보수세력이 평등사상을 펼치는
천주교를 밀어내려고 하는데요.
1866년 카톨릭교 탄압의 포고령이 내려지고
프랑스 선교사 9명과 국내 신도 8,000명이 처참하게
처형되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죠.
그리고 병인양요로까지 이어지며
프랑스 함대를 힘으로 물리친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양이를 내세우고 쇄국정책을
더 강하게 행해요.
사실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이 아니어도
그전에 집권한 현종이나 철종때에도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하지않고 거부했는데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쇄국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고해요.
이 단어는 1800년대 일본의 학자인
시즈키 다다오가 만들어낸 단어라고 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때 우리에게까지
이 단어가 알려지게 된거죠.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을 정의하자면
다른 나라와의 관계 및 교류를 하지않고
문호를 굳게 닫으며 서로 통상하지않는
정책이라고 볼 수 있죠.
그리고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은
찬.반 의견이 나뉘고 있다고 했는데요.
이는 외부로부터 조선을 격리함으로써
봉건왕조의 멸망을 막아내려는 봉건지배계급의
기대 및 이익을 반영하고 있어요.
때문에 외래 침략자를 격퇴한
공적으로 찬양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조선은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가져와 나라의 발전 및 근대화를
실현시켜 외래 침략자에 대한 대처를 해야했었죠.
봉건왕조를 수호하려한 쇄국만 강조하는 길이
결국 국제적 위기를 더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겠죠.
여러분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당시에 잘못된 판달일까요?
그 당시에는 행해야했던 정책이었을까요?
그 당시는 변화가 역동적으로 일어나던 시기라
어느 한 쪽이 딱 정답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은데요.
오늘은 이만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에 대한
글을 마무리할게요.
조금이나마 이해에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며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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